

사람in
린지 스톤브리지
손성화
한나 아렌트의 삶과 지적 작업이 교차하는
몰입감 넘치는 새로운 전기
한나 아렌트는 개인적 경험 없이는 사유할 수 없다고 믿었다. 아렌트에게 각각의 모든 사유는 뒤늦은 사유, 즉 어떤 문제나 사건에 관한 성찰이었다. 사유한다는 것은 살면서 어떤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새로이 결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사유는 응답이자 저항이었다. 그렇기에 아렌트의 경험과 철학을 가로지르며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혁명론』이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을 담은 이 책은 아렌트를 이해하기에 더없이 적합하다.
저자 린지 스톤브리지는 한나 아렌트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사유하는 삶을 시작한 어린시절부터 귀르스수용소를 탈출해 프랑스 몽토방에서 체류하던 시기, 뉴욕 어퍼웨스트사이드 아파트의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타자기로 원고를 집필하던 때까지, 아렌트의 삶과 지적 작업을 생생하고 유려하게 우리 곁으로 불러낸다. 칸트, 하이데거, 후설, 야스퍼스의 철학이 아렌트에게 와서 어떻게 인간의 복수성과 악의 평범성, 세계에 대한 사랑이 되었는지 아렌트의 저서,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 사적인 대화 속에서 영민하게 길어 올린다.
나는 누구이기에 판단하는가? 한나 아렌트는 내가 실제로 판단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답했다. 사유를, 판단을 외주화하는 시대, 아렌트가 태어난 지 120년이 지났지만 아렌트 철학은 여전히 우리에게 사유하는 인간으로 바로 설 용기를 준다.
<출판사 서평>
“아렌트 연구자라면 가장 쓰고 싶어 할 유형의 책이다. 아렌트를 다룬 저서 가운데 이처럼 매력적이고 흡입력 있는 책은 지금껏 없었다.”
_김선욱 숭실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 PEN/재클린 보그라드 웰드 전기상 최종 후보
★ 오웰상 정치 글쓰기 부문 최종 후보
무슨 일이 벌어졌나? 왜 그런 일이 벌어졌나?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나?
사유하는 인간 한나 아렌트의 가장 생생한 목소리
난민을 개처럼 묻어버리는 비극이 어쩌다가 유럽에서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도 않는 다반사가 되었는지 사유하면서 아렌트는 ‘부메랑 효과boomerang effect’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제국주의 특유의 표지인 행정적, 인종주의적 탈인간화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유럽 본토로 되돌아온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아렌트는 현대 전체주의의 조직된 야만성이 나치 독일이나 소비에트 볼셰비즘에만 속한 일탈이 아니라, 개를 걷어차고 파묻어온 기나긴 제국 식민주의 역사의 한 부분임을 최초로 파악한, 사실상 몇 안 되는 유럽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만약 활자화된 단어의 매개에 의존하지 않고 제가 가서 이 걸어 다니는 재앙을 직접 보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거예요.” 아렌트는 1960년 12월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 카를 야스퍼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누구이기에 판단하는가?’ 이것이 바로 아이히만 사건이 제기한 질문이었다. 내가 실제로 판단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한나 아렌트의 답이었다. 이는 새로운 정치적 질문에 대한 실존적 대답이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무사유성에 ‘맞서’ 판단했다. 아렌트는 지배적 도덕 감정에 맞서 나아갔다. 유대인의 부역 행위를 지적했고, 아이히만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의 트라우마적 비탄이 법을 허약하게 하거나 나쁜 정치에 쓰이는 것을 거부했으며, 아이히만의 평범하고 진부한 하찮음을 역설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사실에 개인적으로 응답하는 방식 역시 중요하지 않게 된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을 용인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망각의 구멍에 빠지지 않고
다시 또 다시 사유하고 행동하는 자유로운 인간
우리는 허공을 달리고 있지만 함께 달린다
정치에 대한 냉소와 환멸, 누구에게든 향할 태세인 막연한 증오, 사실보다 설득력이 강한 허구를 선호하는 음모론, 그리고 고립과 외로움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올곧게 생각할 수 있을까? 사랑하고, 소중히 간직하고, 투쟁할 만한 대상으로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가장 잘 지켜내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자유를 보호하고자 우리가 만들어야 할 울타리와 다리는 무엇이고, 부수어야 할 벽은 무엇일까?
저자는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한 우리가 계속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에 주목한다. 쾨니히스베르크 다리 위에서, 포르부 발터베냐민길 위에서, 몽토방의 좁은 길을 따라 걸으며,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일리소스 묘석 앞에서 아렌트가 가르쳐준 대로 아렌트의 입장에서 자신의 사유를 펼친다.
한나 아렌트에게 자유로운 정신을 지닌다는 것은 도그마와 정치적 확실성, 이론적 안전지대, 만족감을 주는 이데올로기에서 멀어지는 것이었다. 그 대신 현실의 각종 위험과 취약성, 신비로움, 당혹스러움을 회피하지 않고 견뎌내는 기술을 함양하는 법을 배운다는 뜻이었다.
자유로운 정신은 1776년 미국에서는 ‘공적 행복’으로, 1789년 프랑스에서는 ‘공적 자유’로 불렸다. 2019년 레바논에서는 “전부가 전부다Kellon ya’ani kellon!”라고 불렸다. 2022년 이란과 쿠르디스탄에서는 “여성, 삶, 자유Jin, Jiyan, Azadî”라고, 우크라이나에서는 “우크라이나에 영광을Slava Ukraini”이라고 불렸다. 2026년 대한민국에서 자유로운 정신은 무엇으로 불려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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