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호미디어
미셸 몽테뉴
김지낭
“나는 내 본성인 흔들림과 불확실성을 즐기기로 했다”
나라는 세계를 재료 삼아 인간 내면을 치열하게 응시하고 탐험한 몽테뉴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필요한 만큼 행복한 삶’을 말하다
에세이 장르의 시초가 된 『에세』를 거닐며, 진솔하고 명징한 사색의 편린을 주워 보자
프랑스어로 쓰인 원전 『에세』는 10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에 총 107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찍이 몽테뉴의 철학에 매료되어 의학에서 서양철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40년 가까이 몽테뉴를 연구하며 그 가르침을 따라온 저자 오타케 게이는 현대인들이 좀 더 쉽고 가깝게 몽테뉴와 만날 수 있도록 원전 일부를 초역해 『초역 몽테뉴의 말 - 에세』로 새로이 엮었다. 끝없는 경쟁에 내몰리고, 늘 타인을 의식하고, 짙은 열패감과 이유 모를 고독, 불안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안온한 위로와 울림을 전하는 구절을 엄선했다. 여기에 저자의 해석을 더하여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필요한 만큼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이야기를 담았다. 불안과 혼돈의 시대를 버텨내고 생의 기쁨을 찾기 위한 목마름으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돌아보고 자문하며 자신을 진정으로 소유하고자 한 몽테뉴. 450여 년이 흐른 오늘에도 빛바래지 않은 그의 말에서 나를 오롯이 지키는 삶의 방도를 길어 올려 보자.
<출판사 서평>
‘크세주(Que sais-je)’, 나는 무엇을 아는가?
미셸 드 몽테뉴(1533~1592)가 남긴 대표 경구다. 반성적 사고를 담은 이 짧은 문장에 몽테뉴의 철학의 진수와 삶을 대하는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몽테뉴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문필가다. 그가 태어나 활동한 16세기 프랑스는 역사상 최대의 혼란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의 이름을 내건 내전으로 나라 전체가 억압과 학살, 의심과 불안, 공포와 절망이 만연했다. 가톨릭과 개신교 세력으로 분열된 프랑스는 이어진 권력 투쟁으로 유례없는 무질서 속에 내던져졌다.
몽테뉴는 더없이 혼란했던 그 시대에 공직자로서 분투했다. 검을 들고 싸운 것이 아니라 중재자로서 바쁘게 뛰어다니며 힘겨운 현실에 몸을 담갔다. ‘다름’에 대한 증오와 독선으로 가득한 극단적 대립의 한복판에서 몽테뉴는 절제된 태도와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부친이 작고한 뒤에는 모든 직을 내려놓고 자신의 성에 은거하며 ‘밖’이 아닌 자신의 ‘안’을 치열하게 들여다보았다. 자기 내면을 깊이 사색하며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가장 보편의 사실과 깨달음을 성실히 기록하는 데 전념했다. 인간의 불완전성과 삶의 불확실성, 개인의 내면적 자유와 행복을 진솔하고도 예리한 필치로 담은 걸작 『에세(Les Essais)』는 그렇게 탄생했다.
몽테뉴가 사상가라고 일컬어지는 이유는 그가 학자여서가 아니라 『에세』를 남겼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대사상가이자 모럴리스트의 시조라고도 불리지만, 확고한 사상 체계를 구축하지는 않았다. 그런 까닭에 그의 이름은 철학사 교과서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파스칼, 루소, 니체를 비롯한 세계의 위대한 철학자들이 『에세』를 애독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에세』를 집필하며 몽테뉴가 사색한 주제로는 ‘죽음’, ‘삶’, ‘판단력’, ‘덧없음(무상)’, ‘무지’, ‘자연’ 등이 있다. 그리고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확고한 답을 내리지 않는다. 그저 자기 생각을 떠오르는 대로 진솔하고 담백하게 기록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은 우리에게 명령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대개 시사점을 던지는 데 그친다. 이 또한 그의 매력 중 하나다. 몽테뉴를 일컬어 ‘자유로운 정신의 아버지’, ‘승리자’라고 칭한 니체는 “몽테뉴가 쓴 『에세』를 읽고 이 세상을 사는 기쁨이 커졌다.”라는 찬사를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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